
2025 년 11 월 가을 정취가 깊어 가는 벨기에 브뤼셀에서는 ‘엑스포트 /임포트 (EXPORT/IMPORT)’ 페스티벌이 열렸다 . 브뤼셀의 어린이청소년극 프로덕션 하우스이자 극장인 브롱스 (Bronks)에서 2012 년 시작되어 2 년마다 열리고 있는 이 축제는 , 2018 년부터는 브뤼셀의 또 다른 어린이청소년극 극장인 라 몽타뉴 마직 (La Montagne Magique)과 함께 공동 개최의 형태로 이뤄지고 있다 . 벨기에는 영토는 작지만 프랑스어 , 네덜란드어 , 독일어를 사용하는 지역이 공존한다는 독특한 특성을 지닌 나라인데 , 브롱스는 네덜란드어권 , 라 몽타뉴 마직은 프랑스어권 어린이청소년극의 장이라는 점을 생각할 때 ‘엑스포트 /임포트 페스티벌 ’은 벨기에 내 두 개의 다른 문화권이 협업해서 축제를 연다는 의미를 띠기도 한다 . 2025 년에는 11 월 7 일부터 11 일까지 총 5 일간 벨기에를 비롯하여 프랑스 , 네덜란드 , 스페인 , 체코 등 유럽 각국의 약 23 개의 공연을 선보였는데 , 그 중에는 벨기에와 이탈리아 , 또 벨기에와 팔레스타인의 합작을 통해 제작된 공연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
브뤼셀은 벨기에의 수도이면서 , 동시에 북대서양조약기구 (NATO) 본부 및 유럽연합 (EU) 주요 본부가 위치해 있어 서구 사회에서 중요한 정치적 , 문화적 상징성을 갖는 도시이다 . 프랑스 , 네덜란드 등과 언어 , 문화 등의 연결고리가 존재하지만 , 그들과 달리 벨기에 , 나아가 브뤼셀만의 고유한 문화적 색깔을 만들어 왔다는 점이 흥미롭고 , 또 최근에는 세계 각지에서 이주해온 다수의 이민자들이 함께 살아가는 도시로서 다양한 문화의 교차가 역동적으로 일어나는 곳이라는 점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 ‘엑스포트 /임포트 페스티벌 ’은 이러한 환경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동시대 어린이 , 청소년들의 호흡에 맞춰 그 문화적 역동성을 뿜어내기라도 하듯 다양하고 도전적이며 실험적인 공연들로 가득 채워진 프로그램을 선보였다 .
‘지금 이 순간 가장 독창적이고 , 감동적이며 , 웃기고 , 위트가 넘치는 어린이청소년극 ’으로 초대한다는 축제 소개의 글을 통해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엑스포트 /임포트 페스티벌 ’에는 예측 가능한 어린이청소년극의 경계를 넘어 기발함과 놀라움의 정도를 과감하게 한계 없이 밀어붙이는 공연들이 많이 눈에 띠었다 . 축제 중반 라 몽타뉴 마직의 예술감독인 칼리 크루넨과 잠시 대화를 나누던 중 , 내가 ‘생각을 촉발하는 (thought-provoking)’ 작품들이 많다는 말을 하자마자 그가 ‘그게 바로 우리가 원하던 바 ’라며 환하게 기쁜 표정을 지었던 순간이 있었는데 , 어린이청소년극이 어떤 새로운 도전을 할 수 있는지 그 가능성의 스펙트럼을 넓게 보여주고 그에 대해 관객들과 열띤 토론을 이어가는 것을 ‘엑스포트 /임포트 페스티벌 ’의 중요한 방향성으로 여기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
축제 전체를 통틀어 공연 형식의 다양성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 움직임 , 오브제 , 댄스 , 서커스 , 음악 , 사운드아트 등 매우 다양한 형식적 기반으로부터 출발하되 그 위에 새로운 실험을 더하는 작품들이 많았다 . 넌버벌 공연들이 다수를 차지했고 말이 중심이 되는 공연들은 소수에 가까웠는데 , 그 중에도 스토리가 분명한 텍스트에 기반한 작품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 ’을 프랑스어로 각색하여 오브제극으로 선보인 <죄와 벌 (Crime et C hâtiment )>, 죽음의 질문을 다루는 텍스트와 정교하고 아름다운 인형 조종이 인상적이었던 <라 브레슈 (La b rèche )>, 베스더강의 범람과 이를 목격한 어린이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창작된 <계곡의 어린이들 (Les Enfants de la V allée )> 등 세 작품 정도였다 . 그 외에는 텍스트 중심이 아닌 실험적 창작 공연에 영어 , 프랑스어 , 네덜란드어 등이 단일하게 또는 섞여서 사용되는 경우였다 . 예를 들면 , 사운드 아트를 기반으로 한 <배드 블록 (Bad Block)>에서 블록이 생명성을 갖고 말을 하기 시작하며 관객과 관계를 맺어 나갈 때 , 즉흥성을 바탕으로 한 <오페라 펑크 (Opéra Punk)>에서 일어나는 기이한 해프닝들에 언어가 사용된 경우 등을 들 수 있다 . 그 외에는 말이 없이 고유한 형식 언어로 이루어진 공연들이 많았는데 , 트럭 안에서 한 사람의 퍼포머가 움직임과 오브제로 만들어내는 착시현상을 통해 마술적 혹은 주술적이기까지 한 스펙터클을 펼치는 <볼룸 (Ballroom)>같은 공연이 있는가 하면 , 시내 한복판에 텐트를 설치해 관객들을 초대한 후 정교하게 만들어진 마스크를 쓴 퍼포머들이 침묵과 음악 사이 몽환적 흐름의 세계로 이끌어가는 <부아트 크라니엔느 (Boîte crânienne )>같은 공연도 인상적이었다 .
축제의 시작을 알리는 오프닝 공연으로 <인 디퍼런스 (In Difference)>라는 세계 초연의 서커스 공연을 선택한 것도 흥미로웠다 . 서로 다른 성향의 두 인물이 하나의 커다란 후프에 기대어 함께 빙글빙글 회전하며 돌아다니는 과정에서 서로 부딪히고 만나며 그렇게 관계 맺음의 진통과 재미를 겪어가는 과정을 담은 공연이었다 . 약 한 시간 동안 후프에서 몸을 떼지 않은 채 움직이는 퍼포머들의 ‘매우 간단하고 쉬워 보이는 ’, 그러나 실제 고도의 기술과 체력이 요구되는 움직임이 인상적이었고 , 후프를 이용한 ‘단순한 ’ 원의 움직임의 변주 속에서 두 인물의 관계의 뉘앙스가 풍성하고 디테일하게 드러나는 묘미가 있었다 . 프랑스 , 네덜란드 , 벨기에 등에 유수한 서커스 학교들이 있어서인지 , 이번 축제에서는 젊은 서커스 예술가들의 활약이 주목되는 작품들이 많았는데 , <비욘드 (Beyond)>에서는 여러 명의 퍼포머가 대형 사다리들을 변형해가며 고도의 신체 역량을 발휘했고 , <이루타 (iRRooTTaa)>에서는 두 명의 퍼포머가 탁구공보다도 작고 단순한 공들을 가지고 정교하고 리듬감 있는 놀이를 구축해나갔다 . 서커스 특유의 긴장감과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스펙타클은 두말할 나위 없이 매력적이었지만 , 그 역동 속에 담긴 연극적 은유의 실마리를 어떻게 연극성의 깊이를 담은 공연으로까지 발전시킬 수 있을까에 대해서는 여전히 여러 질문들이 남았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억에 남는 것은 퍼포머들이 혼신을 다하며 흘리는 땀방울과 숨길 수 없는 즐거움의 표정들이었는데 , 서커스에 대한 열정과 새로운 형식의 공연을 통해 어린이청소년극 관객을 만나고자 하는 젊은 예술가들의 의지가 고스란히 전해졌다 .
이번 축제에서 내게 매우 독특한 인상으로 남은 것은 시작 , 기다림에 관련된 삶의 질문들을 코믹하고도 부조리하게 다룬 <프르미에르 (P remière )> 혹은 <달팽이도 때로는 서두른다 (Ook slakken hebben wel eens haast)>와 같은 공연들이었다 . <프르미에르 >는 무엇이든 시작으로부터 비롯된다는 전제로 , 그림 그리기의 시작 , 촬영의 시작 , 관계의 시작 등 각기 다른 시작의 장면들을 콜라주처럼 보여주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 네덜란드어로 공연되어 내 이해에 한계가 있었던 데다 끊임없이 새로운 인물이 등장하고 상황들이 펼쳐지는 가운데 시작만 있고 그 다음은 없는 장면들이 이어지자 , 나는 시작의 연속이라는 반복되는 패턴 속에 더이상 어떤 논리를 기대하지 않고 공연을 보는 상태에 이르렀는데 , 그제서야 ‘시작이라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 , 시작은 정말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존재하는가 ’를 질문하는 순간을 마주했던 것이 독특한 경험으로 남아있다 . <달팽이도 때로는 서두른다 >는 알록달록한 도구들로 가득 채워진 무대 속 놀이공원의 개장에 관객들을 초대하여 흥분과 기대감으로 시작하지만 , 계속해서 발생하는 문제들로 인해 개장이 미루어지고 문제가 점점 더 심각해지는 상황으로 치달으면서 끝이 보이지 않는 기다림의 시간을 견디는 과정으로 점철된다 . 긴 기다림 끝에 마지막에는 호들갑스럽게 움직이던 인간들 대신 거대한 달팽이가 아주 느린 속도로 무대에 등장하여 문제를 해결하면서 공연이 끝이 나는데 , 내게는 이전까지 증폭되기만 했던 혼란의 속도와 너무나 대조적인 달팽이의 느림이 , 그리고 그 달팽이가 이제껏 아무도 풀지 못했던 문제를 소리 없이 해결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 놀라움으로 체험되었던 기억이 강렬하다 . 그리고 그 체험의 순간은 삶의 속도와 기다림에 대한 묘한 철학적 질문이 떠오르는 순간이기도 했다 .
이번 ‘엑스포트 /임포트 페스티벌 ’에서는 학술 컨퍼런스 및 과정 중 공연 (Work in Progress) 쇼케이스도 함께 이루어졌다 . 아시테지의 유럽 콜라보레이션 프로젝트인 ‘바벨 (BABEL)’ 학술 컨퍼런스에서는 유럽 19 개국 22 개 파트너들이 함께 참여한 프로젝트 과정을 기록한 ‘아동청소년극에서 듣기의 예술 (The Art of Listening in Theatre for Young Audiences)’의 출판 기념 세미나가 있었고 , 이어서 ‘바벨 ’ 최종 워크숍 공연 발표가 있었다 . 또 브롱스에서 2025 년 말에서 2026 년 초에 초연할 예정인 신작 <기념품가게 (Souvenirshop)> 및 <앙트 드 (Antes de …>의 쇼케이스를 선보이고 관객들의 피드백을 공유하는 자리를 마련함으로써 , 새로운 창작의 동력과 기대감을 축제 안에 녹여 내기도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