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시테지 축제
  • 아시테지(ASSITEJ)의 진행하고 있는 사업을 소개합니다.
Home > 아시테지 축제 > 어린이청소년극 IN
  • 발행기사 확인
  • 어린이청소년극 IN: 역사와 기록
    1984년 <연극과 교육>(발행인 김우옥 / 편집인 송애경, 김선, 고순덕, 송인현)이라는 이름으로 시작하여, 어린이청소년을 위한 국내 유일의 간행물로서 발행되었습니다. 이후 제12집을 끝으로 휴간되었다가, 2015년 <아동청소년극포럼>(발행인 김숙희 / 편집인 김유미)으로 재창간되었습니다. 2022년부터는 <어린이청소년극 IN>(발행인 방지영 / 편집인 최지영)으로 명칭을 개정하였습니다. 본지는 전문 비평지로서의 학술적 가치를 인정받아 (주)한국학술정보(KISS)에 등재되었으며, 오프라인 책자 발간과 더불어 네이버 블로그, SNS 등 온라인 플랫폼을 적극 활용하여 현장 이슈에 기민하게 반응하며 접근성을 확장해 왔습니다. 나아가 2026년부터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지원을 통해 자체 포럼을 개최하는 등 어린이청소년극의 담론을 형성하는 실천적 플랫폼으로 거듭나고 있습니다.

[통권24] [2026 7월호] 리뷰 1 2026-07-31

  •  

    생존과 공모 사이, 폭력이 만들어낸 아이들의 지옥




    일제강점기에 설립된 선감학원은 '부랑아 교화'를 명목으로 아이들을 가두고 노동을 착취한 폭력의 현장이다. 연극 <길 위의 아이>(2026.5.21~5.24, 대학로극장 쿼드, 연출 이영숙, 각색 정승진, 원작 김지현)는 이곳을 배경으로 한다. 수십 년이 지나서야 이루어진 진상조사에서 탈출하다 익사하거나 구타로 숨진 아이들의 기록이 확인됐지만, 몇 명이 끌려왔고 몇 명이 살아나갔는지는 아직도 알 수 없다.

    선감학원은 1982년에 문을 닫았다. 그러나 공연의 시간은 '과거 혹은 미래의 어느 때'로 불투명하다. '부랑아'라는 이름으로 붙잡혀 온 선오와 태주는 원장이 자리를 비운 사이 원장실을 놀이터 삼아 자신들을 가둔 어른들을 흉내 낸다. 그 놀이는 점차 둘의 운명을 가르는 선택으로 이어진다. 선오는 체제 안에 남고, 태주는 그 체제를 벗어나려 한다.

     


     

    놀이가 타락하는 곳

    이 작품에서 놀이는 단순한 유희가 아니다. 감당하기 어려운 공포를 견디기 위해 아이들이 스스로 만들어낸 생존의 방식이다. 다만 살아남기 위해 시작한 놀이가 끝내 폭력을 되풀이하는 방식으로 변해 간다는 점에서, 이 놀이는 처음부터 비극을 품고 있다. 요한 호이징가(Johan Huizinga)는 놀이를 현실과 분리된 시공간에서 이루어지는 자유로운 행위로 설명했다. 그가 말한 '마법의 원(magic circle)' 안에서는 현실과 다른 규칙이 작동한다.

    원장실도 그런 공간이다. 번호로만 불리던 두 아이는 원장의 모자를 쓰고 경찰이 되며, 자신들을 억압했던 어른들을 흉내 낸다. 현실에서는 명령에 복종해야 하지만 놀이 안에서는 누가 원장이 되고 누가 죄인이 될지를 스스로 정한다. 원장실은 선감학원을 축소해 놓은 공간이 되고, 아이들은 그 안에서 자신들을 지배했던 권력의 질서를 반복한다.

    그러나 놀이에는 결국 타락의 순간이 찾아온다. 처음 원장의 모자는 놀이의 소품이다. 가위바위보에 지면, 벗으면 그만인 모자다. 하지만 놀이가 계속될수록 흉내는 현실을 닮아간다. 아이들은 다른 아이들을 잡아오고, 이름 대신 번호를 붙이며, 어른들이 행사하던 권력을 그대로 수행하기 시작한다. 폭력은 더 이상 놀이의 소재가 아니라 놀이의 규칙이 된다.

    로제 카이와(Roger Caillois)는 모방 놀이의 타락을 '역할 속에서 자기를 잃는 상태'로 설명한다. 놀이와 현실의 경계가 무너지고, 흉내 내던 존재가 끝내 그 역할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순간이다. 마지막에 선오는 다시 원장의 모자를 쓴다. 그러나 이번에는 놀이를 위해서가 아니다. 중대장이 된 그는 탈출하려는 아이들을 막고 태주를 독방에 가두며, 처음에는 벗을 수 있었던 모자를 이제는 벗을 수 없는 모자로 만든다. 놀이는 실패한 것이 아니라, 너무도 완벽하게 현실이 되었다.

    아이들이 다른 아이들을 어른들에게 넘긴 것은 살아남기 위해서였다. 맞지 않고, 염전에 끌려가지 않고, 빵과 우유를 얻기 위해서였다. 살아남으려면 누군가를 대신 내주어야 하는 질서 속에서 피해자는 또 다른 피해자를 관리하는 사람이 된다. 폭력은 아이들을 억압하는 데 그치지 않고 아이들이 서로를 감시하고 붙잡으며 폭력을 대신 수행하도록 만들었다.

    놀이가 끝난 자리에는 실제로 죽어간 아이들이 남는다. 아이들이 흉내 낸 폭력은 허구가 아니다. 거리의 아이들을 수용하고 착취하고 버리는 동안, 폭력의 맨 아래에는 언제나 가장 어리고 가장 힘없는 몸들이 놓여 있었다.

     


     

    보이지 않는 아이들의 목소리

    이 극에는 무대에 오르지 않는 아이들이 있다. 동수를 비롯해 죽어간 아이들은 배우의 몸으로 등장하지 않는다. 무대에는 선오와 태주 두 사람만 존재하고, 죽은 아이들의 자리는 캐비닛에서 쏟아지는 신발들, 검은 그림자와 괴물의 형상이 대신한다. 이는 죽음을 함부로 재현하지 않으려는 연출의 선택이자, 보이지 않는 아이들의 존재를 더욱 선명하게 환기하는 방식이다.

    동수를 괴물로 형상화한 연출은 작품의 설득력이 극대화되는 순간이다. 캐비닛 문이 열리고 신발들이 쏟아진 뒤, 검은 그림자는 공간을 뒤덮으며 괴물의 형상으로 변해 간다. 이 괴물은 죽은 동수의 원혼이 아니다. 생존을 위해 외면했던 기억과, 다른 아이들의 죽음에 자신 또한 연루되어 있다는 죄책감이 괴물이라는 형상으로 발현된 것이다. 죽음은 과거의 사건으로 머물지 않고 살아남은 아이들의 현재를 끈질기게 따라다닌다.

    태주는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라고 되뇌지만, 작품은 그 죄책감을 쉽게 도덕의 문제로 환원하지 않는다. 죽은 아이들을 직접 묻은 것도 선택이 아니었다. 맞지 않고, 굶지 않고 살아남기 위해 반드시 해야만 했던 일이다. 작품이 응시하는 것도 아이들의 죄가 아니다. 아이들에게 그런 행동밖에 남기지 않은 폭력의 구조다.

    아이들을 죽인 것은 선오도 태주도 아니다. 아이들이 서로를 배신하지 않고는 살아남을 수 없도록 만든 국가와 제도, 그리고 그 질서를 유지한 어른들이다. 그래서 마지막에 선오와 태주가 서로 다른 길을 택하는 순간에도 어느 한쪽을 쉽게 단죄할 수 없다. 선오는 선감학원 안에 남고, 태주는 죽음을 무릅쓰고 바깥을 향한다. 한 사람은 괴물의 뱃속에서 살아가는 길을, 다른 한 사람은 그 괴물의 몸 바깥으로 나가는 길을 택한다. 둘의 선택은 용기와 비겁함, 저항과 순응이라는 이분법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이 대비는 마지막 장면에서 절정에 이른다. 선오는 도지사 앞에서 선감학원을 찬양하는 연설을 하고, 태주는 바다를 향해 달린다. 나란히 놓인 두 사람의 선택은 비극성을 더욱 배가시킨다. 선오는 자신이 선감학원의 보호와 교육 덕분에 새로운 삶을 얻었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자신의 언어가 아닌 살아남기 위해 되풀이해야 하는 국가의 언어다. 루이 알튀세르(Louis Althusser)가 말한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는 바로 이 지점에서 드러난다. 국가는 폭력만으로 사람을 지배하지 않고, 피해자가 지배자의 언어를 자신의 말처럼 되풀이하게 만든다. 피해자를 자기 피해를 부정하는 증인으로 세우는 것, 그것이 폭력이 가장 교묘하게 작동하는 방식이다. 한 사람은 그 언어 안으로 들어가고, 다른 한 사람은 그 언어 밖으로 걸어 나간다. 작품은 어느 쪽도 영웅이나 배신자로 재단하지 않는다. 두 사람보다 먼저 심판받아야 할 것은 아이들에게 그런 선택밖에 남겨 두지 않은 세계다.

     


     

    영상이 넓히고 공간이 남긴 것

    연출은 영상을 통해 원장실이라는 좁은 공간 바깥의 시간과 기억을 불러온다. 오프닝의 선감학원 홍보영상은 의도적으로 경쾌하고 키치한 분위기를 유지한다. '부랑아 근절'과 '자발적 격리 및 재교육'이라는 문구는 아이들을 가두고 노동을 착취한 폭력을 보호와 교육의 언어로 포장한다. 이 가벼운 선전의 톤은 뒤이어 펼쳐질 비극과 충돌하며 아이들이 겪은 참상을 더욱 잔혹하게 만든다.

    공간 구성에서는 다른 가능성도 떠오른다. 대학로극장 쿼드는 객석과 무대의 관계를 다양하게 바꿀 수 있는 블랙박스 극장이지만, 공연은 프로시니엄 형식을 택했다. 초반에는 배우들이 2층 객석에서 등장하며 선감학원의 폐쇄된 공간을 객석까지 넓힌다. 이후 관객은 다시 어두운 객석에서 무대를 바라보는 익숙한 위치로 돌아온다. 아이들이 갇혀 있다는 사실은 전달되지만, 관객을 그 감금의 구조 안으로 끌어들이지는 못한다.

    객석을 사면으로 둘렀다면 관객은 사건에 더 깊이 연루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공연은 그 길을 택하지 않고, 마지막까지 관객을 무대 밖에 남겨둔다. 에필로그에 이르면 그 선택의 이유가 비로소 드러난다. 살아남은 태주는 기자 앞에 서서 “믿어도 되는 사람이에요?”라고 거듭 묻는다. 수십 년 동안 피해자들은 말했지만, 사회는 듣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 질문에 답해야 할 사람은 기자가 아니라 몰랐던 어른들, 더 정확히는 몰라도 되었던 어른들이다. 아이들이 끌려가고 죽어 나가는 동안 사회는 그들을 보이지 않는 곳으로 밀어두었을 뿐이다. 태주의 질문은 그 무관심을 오래 응시하게 만든다. 몰랐다는 것이 무죄가 아니라, 몰라도 되는 자리에 있었다는 것 자체가 이미 폭력에 가담하는 일이었음을.